어제 늦게 기차에 올랐다. 맞은 편에 앉은 조용한 아주머니와 내 일정을 이야기하고(물론 손짓발짓으로) 글을 작성하고 누우려고 하는데 아주머니는 다음역에서 내리고 술이 취한 듯한 한무리의 남자들이 탔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저씨와 아들이 내 앞에 자리를 잡는다. 휘는 잠이 들었고, 그 아저씨 나에게 이름이 무엇이냐며 반갑게 악수를 청하고 러시아말로 한참을 중얼거린다. 물론 나는 한마디도 못알아 듣는다. 그리곤 잠이들었다.

아침에 느즈막하게 일어난다. 급할건 없다. 어차피 일어나도 누워도 기차는 하바로프스크로 나를 데려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휘와 아침을 챙겨 먹는다. 나는 빵을, 휘는 도시락 라면을 선택한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각자 하고 싶은 걸 한다. 휘는 전자책이나 만화책을 본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앞에 아저씨는 신나게 자더니 일어나 동료들과 한참 이야기하며 먹으며 지낸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 계속 동료들과 보드카를 먹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웃으며 매우 친근하게 이야기하는데 알아들 수 가있나. 다만 술꾼이라는 것은 알겠다. 정류장에 잠시 서면 같이 담배피러  가자고하고 자꾸 악수하자고 하는 것도 습관이다. 그러더니 동료들과 투닥투닥한다. 아~ 시끄럽고 번잡스러워서 내려줬음 좋겠다. 다행이도 12시쯤 치타역에서 내린다. 시끄럽던 동료들도 모두 내린다. 아마 동네 사람들끼리 어디 다녀오는 길이었나보다. 나보고 먹으라고 빵도 2개 주고 가고 먹던 음료수도 몽땅 두고간다. 빵이야 손을 안댄 것이니 먹겠지만 음료수는 어쩌라고... 결국 음료수는 내가 버려주는 꼴이된다. 기차 출발전 아래를 보니 손자 주려고 산 것인지 메이드인차이나가 뚜렷한 옆구리에 끼고탄 비비탄 총 장난감 박스가 보인다. 이것도 두고같네... 역무원에게 두고 갔다고 하지만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잠시 후 열차가 출발하자 역무원이 뛰어와 장난감을 들고는 간다 아마 찾으러 왔나보다. 출발하는 기차에서 장난감 상자를 던진다. 술이 왠수다. 그 아저씨 일행이 내리자 역무원과 옆자리 아줌마도 좋아라한다. 그 후에 다른 덩치 큰 아저씨가 앞에 탔는데 타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자고 있다.

열차는 계속 달리는데 숫자가 낮은 002호의 이기차는 전에 탔던 기차들에 비해 정차하는 정류장 수가 적은 것 같다. 아마 큰 역만 정차하는 열차인 듯, 4, 5시간에 한 번 정도 정차하는 것 같다. 이루크추크 이후부터 열차밖 풍경은 아주 근사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 구간은 밤 기차여서 자느라 잘 모르겠고, 모스크바에서 노보시비르스크의 구간은 산은 없고 평지만 있었는데 기찻길 주위로 자작나무가 풍경을 방해해서 볼거리가 별로 없었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이루크추크는 아주 넓은 평야와 밀밭의 천지였다. 산도 나무도 거의 없었다. 오늘자 이루크추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의 구간은 장관이다. 높지는 않지만 근사한 산과 하천과 강 그리고 푸른 초원이 같이 존재한다. 이렇게 멋진 곳에 사람사는 집은 가끔보이는 아주 작은 마을을 제외하면 없다. 이렇게 근사한 곳을 사람손이 닿지 않고 있으니 깨끗하고 근사하다. 아마 우리나라였으면 이런 여름에 온갖 피서인파와 장사인파로 장사진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커서야 장사진을 이룰 인구도 부족하겠다.

기차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지 않으면 조용하고 각자 할일을 찾아 할 뿐이다. 러시아인들은 낮말퍼즐이나 카드놀이 등을 하고 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사람이 많다. 물론 대부분 뭘 먹고는 바로 누워서 자고들 있다. 우리 부자도 간식 조금 먹고 자고, 책보고, 핸드폰을 만진다. 앞자리 새로운 아저씨는 조용한 사람인 것 같아 다행이다. 앞자리 동료의 복이 제일 큰 것 같다.

오후 쯤 이루크추크에서 같이 탄 학국인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에게 가본다. 탈 때 옆 칸에 탔는데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가서 별일 없냐고 묻고 아들과 20일째 여행중인데, 그래도 한국 남자 동료가 있는 것 처럼 말 걸어주면 다른 사람들이 쉽게 보지 않을 것 같아서 와봤다고 했더니 앳되보이는 여학생들이 고마워한다.괜한 오지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심적으로 젊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무슨일 있으면 서로 도와주자고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저녁으로 나는 도시락 사발면을 먹고, 휘는 주정꾼 이저씨가 준 빵을 먹어보더니 너무 맛있다고 두 개를 모두 먹어치운다. 방금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어서 70루불에 하나 사준다. 쥬스도 다 먹어서 객차에서 차장에게 150루불을 주고 오렌지 쥬스와 과자를 한 봉지 구입한다. 사실 객차 담당직원이 150루불어치를 사주면 객차와 책차사이에서 담배를 피게 해주겠다는데, 사실 안사도 필 수 있는 걸 알지만 어차피 사려했기에 반 농담으로 웃으며 사준다. 오늘 실적이 모자른가~

블라디보스톡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유럽과 가까운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이 가장 젠틀하고 세련됐었고, 점점 중앙아시아와 중국, 몽골과 가까와지며, 중앙에서 멀어져서 그런지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나 매너가 거칠어진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정은 더 깊은 것 같아보이기는 하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기찻길로 9,250km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대략 700km정도 되니, 이 여정을 마치면 아마 10,000km를 기차로만 달리게 될 것이다.
Posted by 휘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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